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를 봤습니다.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쯤 될 것 같군요. 누군가는 왜 번역한 제목을 내걸지 않고 해석 안되는 영어로 써놓았냐고 하던데, 사실 그러면 너무 고리타분한 냄새가 풍기니 어쩌겠어요. 국어사랑이란 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수입사 측에서는 어떻게든 관객을 끌어야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원제를 그대로 갖다 쓴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단, 그리스도의 패션(Fashion of Christ)으로 해석할 가능성은 제쳐두기로 하죠.

이 영화에는 네타(Spoiler)라는게 따로 없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묘사하니,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성경 속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것은 상식으로라도 많이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이렇게 성공한 것은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란게 확실하겠죠.

이 영화의 성공은 ‘리얼하게’ 고난의 장면을 묘사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십자가 사건을 다룬 영화들을 보면, 그 장면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꺼려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벤 허나 쿼바디스같은 영화를 보면 예수님의 얼굴조차도 거의 화면에 나타나지 않죠. 사실 예수님은 백인이 아닌 아랍 계통의 유대인이었으니 영화를 만드는 그네들로써는 갈등이 생겼을 겁니다. 사실에 충실하자니 아랍인같은 얼굴을 내보내면 관객이 반발할 테고, 그렇다고 백인 얼굴로 하자니 사실이 아니라 꺼림칙하고.

그런걸 멜 깁슨은 과감하게 무시하고 백인 코드로 돌진합니다. 사실 영화를 보고 나서의 생각은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는 느낌이에요. 영화 내내 예수 역의 제임스 카비젤의 얼굴과 피부는 수많은 상처와 피로 뒤덮여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니까요. 영화에서 중요한 건 그 상처와 고난이지 얼굴 모습이 중요한건 아니었다고 생각되더군요.

솔직히 영화가 시작할 때는 상당히 지루한 영화가 될거라 예상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이고, 러닝타임은 두시간이 좀 넘는 126분씩이나 되었거든요. 하지만 이게 웬일, 초반의 체포장면이 지나고 처벌장면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눈을 뗄레야 뗄 수가 없었습니다. 화면에는 피와 살점과 채찍이 난무하는데도, 익히 알고 있는 ‘십자가에 못박는’ 장면이 언제나 나오려나 하고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게 되는 거에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괴롭히는 장면이 계속 가슴 속에 차오르는데, 일반적인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스릴감이 더해가는 것 이상이더라구요. 마지막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이 나오고 나서야 한숨 돌리겠더군요. 그 때 드는 생각은 ‘죽었으니 이제야 그 잔인한 괴롭힘이 끝나는구나’ 하는 안도감. 가장 잔인한 장면이 오히려 한숨 돌리는 장면이 되다니, 참 역설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같이 본 사람과 그런 얘기를 했어요. 영화에서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개역판이 아니라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공동번역이 되었어야 하는거 아니냐구요. 영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지니까요. 그래자 문득 영화의 대사를 영어가 아니라 아람어와 라틴어로 한 까닭이 영어권의 다양한 성경간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느 번역판이 정통이라는 것을 따지기보다는 차라리 원어로 승부한 선택, 멋졌습니다. 멜 깁슨이 직접 선택한 거라면 앞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화끈한 액션도 아니고 피와 살이 난무하니 연인들이 보기에 적합한 영화도 아니라 그렇게 흥행하지는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멋진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혼자 보거나 단체로 관람하는 편이 더 좋을것 같다는 느낌이네요.

[spoiler show=”그리고” hide=”단편적인 느낌들”]1.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될 당시 베드로의 액션, 좋았어요 🙂
오랜 기간의 어부생활로 단련된 베드로, 위기 상황에서 상대방의 귀를 자를 정도라면 그정도 격투는 가능했어야 하겠죠. 성경에서 그 부분을 볼 때마다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한게 아니군요.

2.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장면.
미처 생각 못햇는데 영화를 보면서 눈이 번뜩 뜨이더군요. 저런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느낌. 끄덕끄덕.

3.모니카 벨루치.
역시 붕 뜨는 느낌이에요. 막달라 마리아가 아름다운 여인이라고는 하지만 좀 어색하더군요.

4.막달라 마리아.
어머니와 성모의 이중적인 역을 가슴아프게 표현해내시더군요. 아주 강렬한 연기였습니다. 피에타 장면은 정말 가슴아프더라구요.

5.결말.
오버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딱 적당한 데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브레이브 하트에서처럼 프리덤을 불러댈까봐 조마조마했어요. 다행입니다 🙂

좋은 영화였지만, 다시 보라면.. 영화보면서 가슴졸인 것을 생각한다면 힘들 것 같군요. 한번은 좋지만 두번은 부담스러워요. ^^;

[/spoiler]

4 thoughts on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1. sirocco

    잘 읽었습니다:-)
    이전처럼 카메라를 슬쩍 돌리거나 흘리거나 하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모든 걸 보여 준 멜 깁슨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참으로 용감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속에서의 성모 마리아는 저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동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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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Dr.Ocean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하는 장면에선..
    제가 기대했던 장면과 좀 틀려서 전 좀 실망을..

    4대 복음서에 다 나오는 말이..
    내가 너에게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닭이 울기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
    라고 나오는데..
    성경에도 보면..
    베드로가 3번째 부인을 하고 예수님과 눈이 딱 마주쳤을때..
    닭이 울었다고 나와있습니다.

    또 영화에서와 달리..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그 제사장의 집안에 있었지만..
    성경에는 그 집의 마당에서 다른 사람들과 불을 쬐다가..
    그런 일이 생기게 되는거죠..

    실제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하고 나서..
    그 먼거리에서.. 예수님과 눈이 딱 마주쳤을때…
    얼마나 뜨끔 했을까요…
    그때 닭이 우는 소리가 딱 들리면서…
    베드로가 울부 짖으며 뛰쳐 나가는…
    머 이런 장면을 기대를 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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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philia

    sirocco님 / 역시 마리아님(..어라?)에 대한 감상은 일치하는군요 🙂

    Dr.Ocean님 / 아, 그렇군요. 불을 쬐면서 생긴 일이란걸 잊어버렸었네요. 닭이 우는 소리가 안들린건 조금 의외였어요.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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