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별 글 목록: 2023년 1월월

헤어질 결심

마침내 이 영화를 흠모하겠다는 결심, 《헤어질 결심》 - 시사저널

형사 장해준은 바위산의 남성 추락사 사건을 수사하면서 사망자의 중국인 부인인 송서래를 알게 됩니다. 용의자로 지목되는 부인을 잠복해서 관찰하면서 점차 호감을 갖게 되는 해준과, 동시에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서래의 만남, 그리고 짧은 연애. 하지만 서래의 노인복지사 일자리와 휴대폰을 이용한 트릭이 드러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네요. 몇 년 후 다시 이포에서 재회한 둘은 또다시 살인사건과 엮이게 되고 이 사건으로 해준은 서래를 다시 의심하며 사건을 수사하게 되는데..

박찬욱 감독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입니다만, 원래 좋아하는 장르가 아닌지라 평범하게 잘 봤다는 느낌입니다. 영화적으로 실마리와 복선을 잘 깔아놓은 전반부와 이 모두가 하나하나 의미있게 회수되는 후반부가 스토리적으로, 영상적으로, 소품 활용으로 기가 막히게 배치하고 구성했다는 점은 정말 박수를 보냅니다만, 그게 개인적으로는 너무 드러나는 것이 약간 거슬린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잘 만든 영화라는 점에는 백배 동감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빠져들 수 있는가 싶으면서도, 이성적으로는 저 사람이 범인인데 싶으면서도 감성적으로 아니라서 다행이다는 마음. 반대로 이번에도 저사람이었네 싶다가 어라 이번엔 아닌가 했는데 알고보니 맞고. 그런데 그 모든게 다 나때문이었어 하는 생각의 흐름이 계속 뒤집히는 이 미묘한 표현을 기가 막히게 했다는 것. 정말 장인이에요 감독님.

그리고 소품들. 스마트와치, 번역앱, 전화기, 신발끈, 반지, 옛날 유행가, 안약 등등. 하나하나가 허투루 쓰이지 않고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사용되는게 기가 막히구요, 카메라의 시선 또한 그냥 찍은게 아니고 말이죠. 아 이렇게 영화보면서 생각 많이하게 만드는건 정말 오랜만이었네요.

어쨌든, 여러 박자가 함께 모여 잘 만들어진 수작입니다. 간만에 이 영화 잘만들었네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 작품, 여러 사람이 추천할 만 하네요. 즐겨 보지 않더라도 봐야 할 거 같은 작품이었어요. 잘 봤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다시 한번 가르는 뜨거운 코트 '더 퍼스트 슬램덩크' [쿡리뷰]

극장판이 나온다는 것도, 애니메이션이란 것도 모르고 있다가 주변에서 한참 떠드는 것을 보고 연휴에 급하게 조조로 예매해서 정말 오랜만에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관람을 했습니다. 워낙 시간이 흐른지라 메가박스 회원도 자동탈회되어서 다음달 말이나 되어야 재가입이 가능하더군요. 덕분에 처음으로 비회원 예매란 것도 해봤네요.

이야기는 송태섭의 시점에서, 북산의 경기 하이라이트인 산왕공고전을 송태섭의 개인사와 교차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오키나와라는 변방에서 어릴적 농구를 잘하던 형을 잃으면서 농구만을 마음의 지주로 삼아온 송태섭이 어떤 마음으로 지내왔는지, 특히 정대만과의 만남과 싸움, 그리고 재회까지가 이어집니다. 반면 채치수와 강백호는 산왕전에서 호흡을 맞추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려지죠. 다만 서태웅은 분량이 영.. 이어지질 않네요 ㅎㅎ

만화로 본 주요 분량은 영상의 힘을 받아 매우 역동적으로 펼쳐집니다. 태섭의 넘버원 가드, 개인의 힘이 아닌 북산이 강하단 것을 깨닫는 채치수, 강백호의 왼손은 거들 뿐 + 제 영광의 시대는 지금입니다, 정대만의 이 소리가 나를 몇번이고 되살아나게 한다 등등. 여기에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비트 강한 음악과 순식간에 관객을 빨아들이는 침묵의 연출이 마지막 2분간 북산-산왕간의 경기에 엄청난 몰입감을 더해주네요.

아쉬운건 태섭과 한나 간의 스토리가 거의 다뤄지지 않은 것. 둘 간의 개인사가 좀더 있었다면 좀더 스토리가 잘 잡힐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긴 했어요. 그래도 오히려 그쪽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질척질척하지 않고 깔끔하게 이야기를 펼쳐낸건지도 모르겠네요.

덕분에 매우 오랜만에 슬램덩크 원작을 소장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새로운 표지 삽화본이 꽤나 멋있게 그려진 것 같아 마음에 들더라구요.

그리스인 이야기 2: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그리스인 이야기 28점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살림

그리스, 특히 아테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 시대, 어떻게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단순한 군사동맹이 아닌 종합방위체제이자 경제공동체로 만들었는지로 시작해 이 체제가 무너지게 된 과정을 황금시대와 우중정치로 이어서 묘사하는 이야기입니다.

1권에서 순수혈통만의 직접지배체제를 구축한 스파르타와 개방된 시민권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피를 수혈할 수 있는 민주주의체제를 구현한 아테네가 대비되지만, 작가는 단순히 민주주의가 더 우월했다는 결론을 바로 내리지는 않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가문과 설득력을 바탕으로 이 민주주의라는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델로스 동맹을 키워냈고, 이집트-시칠리아에 이어 흑해라는 식량공급처를 공고하게 유지하는 체제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데 성공했죠. 반면 우중정치 시대로 이어지는 주요 인사들은 동일한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설득에 실패하거나 과도한 처벌 등으로 인해 구축된 체제를 단시간에 허물어지게 만들고 급기야는 코린토스와 스파르타, 그리고 페르시아의 압력 속에 조그만 도시국가로 쪼그라들고 맙니다.

어느 순간이든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인재나 기회는 오기 마련이었지만 아테네는 번번히 이러한 기회를 놓치는 모습이 계속 포착되기도 하죠. 알키비아데스라는 인물과 군사적인 승리도 중간중간 있었음에도 어이없는 선동가와 잘못된 군사 작전으로 인해 아테네는 많은 인물과 군사력을 그대로 잃어버리고 말아버렸네요.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 우리 입장에서 아테네는 왜 그랬을까 한심하게 보기는 힘든 상황이기도 합니다.

3권에서는 드디어 그리스의 변방에서 세계 제국으로 우뚝 선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읽고 있지만 가장 기대하는 편이라 금방 읽지 않을까 싶네요. 화끈한 스토리가 나올것인만큼 우리나라의 상황도 그렇게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아바타: 물의 길

Avatar 2 Gets 4DX Poster for The Way of Water – United States KNews.MEDIA

간만의 3D 영화 관람. 새단장한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21관에서 관람했습니다. 좌석 수가 확 줄어서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리클라이너를 자리마다 배치해서 확 넓어졌더군요. 거의 누워서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로 하면서 몇몇 자리는 보다 고급형으로 좌석을 꾸며놓은듯. 그래서인지 좌석마다 단가가 달랐습니다. 가장 뒤편에는 미국 스포츠 경기장처럼 유리창을 씌워놓은 관람공간을 따로 마련해놓았더군요.

작품으로 돌아가서, 스토리는 1편의 끝에서 이어지면서 인간들이 다시금 침략해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쿼리치 대령은 나비족의 아바타에 기억을 이식해서 업그레이드된 병력을 이끌고 판도라 행성으로 내려옵니다. 제이크 설리는 네이티리와 아들 둘 딸 둘을 낳고 알콩달콩 살면서 아들들은 군인으로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쿼리치의 등장으로 다시 전투를 개시하게 되고 싸움을 피해 바다 족속들이 살고 있는 제도로 피신하기로 결정하네요. 이곳에서 설리의 가족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물개(일루)도 타고 날치(추락)도 타고 고래(툴쿤)도 사귀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여기에 포경단을 이끌고 쿼리치가 공격해 들어오면서 다시 싸움이 시작됩니다만.. 다음은 막장드라마로.

쿼리치의 잊혀진 아들 스파이더와 원수의 딸인 키리의 관계,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는 죽지 않는 대령, 자연과 교감하는 큰딸 키리의 능력, 망가진 지구에서 이주해오게 될 지구인들 등등 3편의 떡밥이 줄줄이 늘어지네요. 당연히 3편이 기대되는 수순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늘에서 바다로 갔으니 다음은 지하인가 우주인가 싶기도요.

스토리라인은 이렇게 미적지근하지만 서브플롯과 떡밥이 많은만큼 전혀 지루하지 않게 3시간이 흘러갑니다. 게다가 훌륭한 CG로 펼쳐지는 바다속 아쿠아리움을 보는 느낌도 쏠쏠하구요. 이제는 3D TV도 없으니 이런건 극장에서 볼 수밖에 없다는 점도 확실히 봐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다음 편에서는 이야기도 조금 더 완성도있게 끌어올리고 화면과 음향도 잘 유지해서 명작으로서 잘 마무리해주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네요.

MMCA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간만에 북촌으로 나갔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중섭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4월까지 하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예약 없이 바로 가서 현장예약을 하고 관람을 할 수 있더군요. 가서 바로 다음 차수를 접수하고 테라로사에서 좋은 전망을 보면서 쉬다가 입장, 인원 제한도 되어있어서 쾌적하게 관람을 할 수 있어 더 좋았습니다.

작가의 초기작에서 보이는 인물과 소 같은 동물의 모습들, 주로 캔버스보다는 종이에 물고기, 게,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연필화들, 수많은 은지화, 그리고 헤어져 일본에서 살고 있던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그려진 편지화 등 풍성한 컬렉션이 펼쳐집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는지 물음표가 떠오르는 전시였어요. 게다가 이게 전체 컬렉션이 아니라 일부라는 것이 더 충격. 그리고 당시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수집했다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사이에 그려준 작품들인 편지화였어요. 사랑하는 부인을 보지 못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한 글과 그림, 직접 옆에서 놀아주지 못해 그림을 그리며 놀아주는 기분으로 보낸 편지와 그림 등이 마음을 찡하게 하더군요.

다음에 북촌에 가면 다른 갤러리도 둘러보며 좋은 전시를 더 찾아보고 싶네요. Todo 리스트에 갤러리들을 담아놓고만 있는데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관람이었습니다.

 

사라장 & 비르투오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라 장의 바이올린입니다. 거의 한 20여년 전 코엑스에서 연주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전용 홀이 아니었던지라 그리 감명깊은 연주는 아니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냥 잘 하는구나 싶은 생각 정도? 그렇지만 이번 연주회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인데다가 함께 하는 연주자들이 손에 꼽는 분들인만큼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네요.

  • 프로그램
    – 비탈리 샤콘느 g단조
    –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BWV1043
    (협연: 1악장 장유진, 2악장 심동영, 3악장 김예원 협연)
    — intermission —
    –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E장조, Op8-1, RV269 ‘봄’
    / 바이올린 협주곡 g단조, Op8-2, RV315 ‘여름’
    / 바이올린 협주곡 F장조, Op8-3, RV293 ‘가을’
    / 바이올린 협주곡 f단조, Op8-4, RV297 ‘겨울’
  • 앵콜
    – 바흐 Air
    –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

개인적으로는 샤콘느보다는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너무 좋았고, 비발디의 사계는 역시나 명불허전, 깊어진 사라 장의 바이올린 소리와 현악기들+하프시코드의 소리가 너무 좋았습니다. 협연자들 중에서는 악장 장유진 님의 연주가 가장 좋았어요. 혹시 리사이틀 일정이 잡힌다면 꼭 가보고 싶을 정도. 사계는 들으면서 이렇게 첼로를 챌린지하는 곡인줄은 처음 알았네요. 심준호 수석님 사라 장의 눈빛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안정적으로 마지막 악장까지 끌고나가 주셔서 너무 좋았습니다.

앵콜도 너무 좋았어요. 바흐의 Air가 울려퍼지자 콘서트홀의 열기가 살랑살랑 진정되는 느낌, 하지만 관객들의 감동은 너무너무 증폭되는 느낌. 그리고 사계 한 악장으로 깔끔한 마무리. 즐거운 연말 공연이었습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6점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쌤앤파커스

물리학, 특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공간, 시간, 중력의 해석이 점차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던 개념은 급격히 변해 왔습니다. 특히 중력에 의해 각자가 경험하는 시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영화 인터스텔라에도 표현되어 있었고, 물질을 이루는 원자가 실제로 대부분이 빈 공간임에도 원자와 입자 간의 밀어내는 힘에 의해, 그리고 입자의 존재 확률에 의해 물질이 구성되고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사실 또한 새롭기도 했지요. 저자는 이에 더해 시간이란 것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음에도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펼쳐냅니다.

책 첫머리에서 지적하는 부분은 전 우주를 보편타당하게 가로지르는 현재, 곧 시간이라는 기준선은 없다는 점이었어요. 시간은 중력과 공간에 의해 변형되는만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시간축은 다른 공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시간축인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이었고, 그렇기에 A란 지점에서의 시간과 B란 지점에서의 시간은 서로 다른 변수로 봐야 한다는 것이 물리학에서의 장(field)의 개념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었네요. 여기에 더해지는 이야기는 현대 물리학에서 공간에 대한 방정식에는 시간의 변수 자체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 곧 시간은 사물의 변화에 의해 관측되는 현상의 합이라는 이야기였어요.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이런 변화가 가역적이냐 불가역적이냐를 나타내는 엔트로피를 기준으로 나눠진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 또한 엔트로피가 낮은 물질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고, 우리는 태양이라는 엄청난 엔트로피를 보유한 물체 덕분에 변화와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어요.

물리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면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지만, 굳이 물리학적인 책이라기보다는 철학 담론같은 느낌도 많이 가지고 있는 그런 책이었네요. 그래도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우주와 시간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좀더 연구가 진행되어 새로운 가능성과 시각을 열어주는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