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드업 걸 –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이원경 옮김/다른 |
근미래 화석연료의 남용으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고, 많은 국가가 석탄을 두고 전쟁을 하며, 유전자 조작 동식물과 곡식, 원인을 알수 없는 수많은 종류의 전염병 속에서 글로벌기업과 해커가 물밑에서 치열하게 다투는 그런 세계가 배경입니다. 애그리젠 등의 곡물기업이 각국을 좌지우지하는 와중 태국만은 독자적인 유전자 풀을 바탕으로 자급자족을 하고, 동시에 에너지도 킹크스프링이라는 에너지 압축 장치를 이용해 다양한 동력원으로 쓰고 있어요.
앤더슨은 최신기술의 고압축 킹크스프링 공장을 운영하면서 태국의 신품종을 입수하고자 하는 애그리젠의 비밀요원입니다. 그가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나 태국인들의 멸시를 받으며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에미코에게 푹 빠져 자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외에도 공장에서 일하면서 예전의 영화를 회복하고자 기술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국난민 혹생, 환경청의 단속반 화이트셔츠이자 시민의 영웅 짜이디, 그 부관이자 환경청-무역청의 이중스파이 깐야 등이 각자의 음모와 태국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내란 상황까지 몰리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우선, 작가의 필력이 놀랍습니다. 근 7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흘러가기 시작하니 책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의 흡입력이 있네요. 더불어 세계관을 구성하는 능력도 수준급. 세계의 정치상황과 유전자를 둘러싼 대립구도, 사회상과 고위층/하위층의 삶에 대한 묘사가 모두 너무나 리얼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나면 껄끄러운 면이 느껴져요. 가장 치명적인 것은 주인공이라 설정된 에미코는 뛰어난 신체능력과 신인류의 세상을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갑작스런 살인으로 내란의 방아쇠를 당기는 씬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역할 없이 관음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너무나 수동적일 뿐 하는게 없습니다. 그리고 태국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묘사도 너무나 단순하게 미개인을 보는 듯한 눈빛인게, 말 그대로 백인 남자가 동남아에 와서 미개인들을 관찰하는 시점같은 느낌이 책을 읽는 내내 들더군요.
조금 더 진보적인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써 주었다면 더 나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런 생각이나 사상은 잘 바뀌지 않는 거니 아쉽긴 합니다. 누군가 이 작품이 휴고상을 탄건 그 해에 작품이 워낙 없어서였다는 이야기를 했던데, 비슷한걸 느껴서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