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도시

나의 사적인 도시10점
박상미 지음/난다

번역가이자 갤러리스트인 박상미 님의 에세이입니다. 내용을 보니 블로그에 모아놓았던 글을 주변의 권유로 다시 하나하나 손봐서 내놓은 한권인듯 한데, 원래 번역가이셨던만큼 글 하나하나 배치 하나하나를 신경써서 본 느낌이 들어 정말 소중하게 한장한장 넘기며 봤네요. 원래 글을 이런 스타일로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나 느꼈던 ‘어른의 문장’ 같은 느낌이라 참 포근했어요.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읽었고, 그래서 더욱 좋았답니다.

작가님이 뉴욕에 거주하면서 여행이라기보다는 일을 보러, 휴식을 가지러, 지인을 만나러, 혹은 영감을 얻으러 걷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미국 이야기라고는 느끼기 힘들 정도로 자신의 발로 걷거나 앉아서 주변을 살피는 이야기가 많아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분류는 여행서적으로 되어있던데, 이 책을 보고 여행을 한다는건 어불성설이겠지만, 이런 감성으로 낯선 지역에서 살아본다면 어렴풋한 지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평소에 관심을 갖고 눈여겨 본 작품들, 작가들, 그리고 지인을 통해 알고 소개받은 인연들, 그리고 특정 장소에 매겨진 기억들. 하나하나가 지나가는게 아니라 언어로 표현되고 기록된다는 것이 나중에는사진보다 더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 이런걸 느낄 수 있는 멋진 한 권이어서 정말 소중하게 아껴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 나무위키

간만에 본 건담 시리즈네요. 물론 기존 세계관과의 연결점은 없는 독립 작품입니다만, 단순한 메카닉간의 싸움 구도가 아니면서도 지구와 우주권간의 갈등을 잘 표현해내고, 기존과는 반대 구도로 우주 세력이 지구권을 억압하는 구도에다가 어른들간의 사정보다는 그런 사상을 이어받은 2세대들간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작품이라는 것이 독특한 매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주인공들이 히로인+히로인 구조가 되었다는 것 또한 특기할만한 점이었지요 ^^

하지만 하려는 이야기는 25화라는 구성에서 모두 다루기는 좀 힘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긴 했어요. 슬레타와 미오리네의 이야기는 스토리의 중심인만큼 슬레타의 엄마바라기에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인물로의 성장과 극복, 미오리네의 수동적→적극적 행보로의 변화, 프로스페라의 에리크트에 대한 집착과 화해라는 스토리 속에서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구엘과 라우더와 아버지의 관계라던지 엘란과 샤디크, 니카 등의 주역들의 심경의 변화와 사건 해결을 향한 동기 등은 아쉬운 면이 상당히 많았다는 생각이에요. 덕분에 이들이 탑승하는 메카닉의 매력도 그만큼 반감한 것 같기도 했네요.

그래서 마무리가 되고 나서 남는 기억은 에어리얼이 박살난 것, 미오리네의 토마토, 뭔가 최종병기가 있었던 것, 뜬금없는 구엘과 슬레타의 펜싱 장면 정도일까요? 이런 부분을 좀더 많이 그려내고 싶었을 것 같은데 그놈의 화수 제한이 뭔지 이래저래 아쉬운 마무리였습니다. 그래도 꽤나 각본 면에서, 설정 면에서 생각을 많이 하고 제작한 작품이었답니다.

나중에 극장판에서 주인공을 달리 한 시점의 스토리라인이 펼쳐지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볼만한 작품을 접할 수 있었네요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10점
김상욱 지음/바다출판사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이 물리학을 넘어서 화학 생물학과 인류에 대한 이해까지 시도하는 통섭적인 저작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다빈치같은 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공부했던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얼핏 보면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과에다가 지금까지 과학 쪽에 많은 관심을 두고 중고등학교를 거쳐 공학까지 전공한 입장에서 보자면 새로운 뷰를 많이 제시해 주는 멋진 한 편의 책이라는 느낌이었어요. 교수님도 책 전반에 걸쳐서 계속 ‘물리학자 입장에서 본’ 세상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 책이라고 하는데 그게 딱 맞는 말이더라구요.

기본적인 책의 시작은 교수님의 책이 그렇듯 원자입니다. 세상을 구성한느 기본 요소로서의 원자의 특징을 수소 원자의 구조로 시작해 양성자와 전자의 특성, 양성자와 전자를 이루는 쿼크를 비롯한 17종의 기본 입자, 그리고 이들의 작용으로 중력과 전자기력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범위, 주기율표에 따라 전자가 채워지는 방식, 원소별 특징을 차근차근 이야기합니다. 이 과정에서 철보다 무거운 원소는 핵분열, 철보다 가벼운 원소는 핵융합으로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다는 개념이 제시되어요. 우주를 구성하는 별들은 이렇게 수소가 융합하여 헬륨이 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생성된다는 아주 작은 입자→매우 거대한 별과 우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제시해요.

이어서 에너지를 얻고 배출하는 기본 원리가 수소의 이온화에서 방출되고 흡수되는 과정을 기반으로 한다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 수소 이온을 얻고 잃는 과정을 전자의 결합 과정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학교에서 배웠던 공유결합, 이온결합 등이 이야기되고, 이에 따라 분자의 특성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별을 구성하는 다양한 원소 중 지구의 지각에서 가장 다양한 결합을 자랑하는 산소의 역할과 생명체를 이루는 탄소/수소/산소/질소, 그리고 이들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다양한 물질들이 이어지죠.

이런 화학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탄소화합물을 산화시키며 에너지를 얻는 미토콘드리아 기반 호흡과정과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탄소 및 질소를 고정시키는 엽록체의 동식물 순환 구조를 설명합니다. 이부분부터는 각종 사이클에 대한 설명이 좀 대충 넘어가는 느낌이긴 했어요. 그래도 이런 과정이 맨 앞에서 이야기한 수소 이온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는 과정에 이어지는지라 물리학-화학-생물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통합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게 정말 새로왔네요.

후반부는 이제 다세포 동물의 출현과 신경계의 형성, 그리고 인간의 기억과 느낌, 문화의 형성까지 이어지지만 이 부분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직 미지수인 부분이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단순히 생명체를 분류했다고만 알고 있던 계통도가 신경의 형성과 세포별 역할의 구분, 포식동물의 출현과 항상성 유지를 위한 복제/출산 등으로 이어지는 개념은 매우 신선했어요. 이기적 유전자와 사피엔스 등의 최근 서적을 인용하는 부분도 신선했네요.

상당한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과학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원자/분자/생물학/다세포생물/인간의 생각 등의 단계별로 이해의 영역을 뛰어넘는 간극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원자를 아무리 잘 알더라도 물이나 당, 단백질이나 인슐린 등이 왜 그렇게 작용하는지 설명할 수 없고, 분자를 이해하더라도 생물이 왜 항상성을 유지하려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생물의 에너지 획득 원리를 알더라도 다세포생물의 세포가 왜 다르게 발현하는지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생명체의 계통을 잘 이해하더라도 인간은 왜 문화를 만드는지 알 수 없는 것 등등. 그래서 과학의 분야가 나눠지고 인문학이 과학과 분리되어 연구되는 이유는 결국 연구하는 대상의 레벨에 따라 특성이 확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수님도 이 부분을 제일 강조하신 것 같아요.

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문장이 있었네요. 생물 역사의 대멸종을 돌아보면서 한 교수님의 언급입니다. “물론 생물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것이다. 하지만 대멸종이 일어날 때, 최상위 포식자는 언제나 멸종했다. 참고로 지금 최상위 포식자는 인간이다.” 이 거대한 과학적 발견과 역사 속에서 인간이 좀더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네요. 멋진 책이었습니다.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이주혜 옮김/아작

코니 윌리스의 크리스마스 단편 모음집. 구입한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어쩌다보니 한여름에 읽게 되었고, 완독하고 나니 슬슬 찬바람이 불 때가 되었다. 코니 윌리스다운 정신없는 말의 향연과 속사포같은 대화가 가득한 이야기인데, 그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그냥 버리는게 아니라 따뜻한 마음이 내부에 반영되어 있다는게 포인트. 그래서 예전에 다른 단편집에서 읽어본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를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읽을 수 있었고, ‘장식하세닷컴’이 이 단편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 같음.

표제작인 로켓 무용단은 내용은 좋았지만, 주인공이 너무 추운 길바닥에서 고생만 계속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까웠고, ‘우리 여관에는 방이 없어요’는 그냥그냥 괜찮은 이야기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이야기이긴 했음. 주일 설교로 이상한 차별금지법 이야기 대신 차라리 이 소설을 낭독해주면 훨씬 기독교가 좋은 종교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코펠리우스 장난감 가게는 이 단편집 중 유일한 비극이자 못된 이야기라서 논외입니다. ㅎㅎ

장식하세닷컴의 마지막 이야기같이 모든 오해가 풀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선한 행동을 보여주고 그로 인해 복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 모든 악의가 없어지길 바랍니다, 특히 요즘같은 때에는 말이죠.

일곱 도시 이야기

일곱 도시 이야기6점
다나카 요시키 지음, 손진성 옮김/시옷북스

은하영웅전설의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단편 SF 시리즈입니다. 지축이 뒤틀리는 크나큰 대격변으로 대다수의 국가가 멸망하고 인류가 모여사는 곳이 일곱 개의 도시로 축소된 지구가 배경입니다. 단, 격변 당시 달로 대피한 지배층이 있었고, 이들은 지상의 인류가 함부로 달로 오지 못하도록 감시용 군사 위성망을 돌려놓았기에 일곱 도시 간에는 고고도 비행이 불가능하다는 황당한 제약을 걸어놓았죠. 그래놓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달 도시는 멸망했고, 일곱 도시는 육/해상과 저고도 공군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독특한 세계관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기말적인 상황 하에서도 인류는 늘 그랬듯이 서로 반목하고 균형을 깨고 서로가 절대 강자가 되고자 하는 음모와 전쟁을 반복합니다. 이런 상황을 억지로 떠맡거나, 투덜대면서도 즐기거나, 혹은 자신의 야욕을 위해 도시를 전쟁에 끌어들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각각의 단편들이에요. 아퀼로니아의 류 웨이는 은영전의 양 웬리같은 성격의 인물이지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보다는 도시간의 역학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안위를 잘 지켜나가는 인물입니다.

다만 그 반대쪽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인물들은 다양한 면모를 보이네요. 아퀼로니아의 군사적 재능을 대변하는 알마릭 아스발은 정통파 무관이고, 프린스 헤럴드의 카렐 슈터밋+유리 크루건 콤비는 적절한 균형과 견제의 모델, 부에노스 존데의 귄터 노르트는 새롭게 떠오른 방어전의 달인입니다. 여기에 뉴 카멜롯의 독설가 케네스 길포드까지. 이들이 뛰어난 지휘력을 가지고 무언가 도시간 구도를 깨보겠다고 하는 반동세력에는 역시 정치가들이 있습니다. 아퀼로니아의 찰스 모블리지 주니어는 정말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꼬드겨 계속 전쟁을 일으키고, 라우드루프는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 도시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도시들의 균형이란건 정말 묘해서 명장들이 연합해서 전투에 뛰어들더라도 정치적이나 행정적으로 적합한 판단이 병행되지 않으면 모두 실패한 작전이 되는 모습이 계속 묘사됩니다.

어찌보면 작가는 세상만사가 정치지만 그 정치란 것이 머릿속이 꽃밭인 이상향만 제시하는 것이 아닌, 실제 사람이 땅에 발을 딛고 한단계 한단계에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고민하고 수급하고 운영해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계속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현실을 봐도 마찬가지인게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계속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말이지요.

씁쓸한 감상을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었고, 읽을만 한 작품입니다. 다만 소설로서의 재미는 역시나 은영전에 비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