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주 남편 채용의 건

상단주 남편 채용의 건 110점
김기온/라렌느

간만의 로판입니다. 요즘 책을 안읽는건 아닌데 다 연재작이나 두꺼운(!) 실물책이다 보니 완결까지 보는데 시간이 꽤나 걸리네요. 이러다가 우다다 한꺼번에 완독이 되는경우에는 오히려 리뷰가 밀리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완독에 성공한 한 작품이 이 상단주 남편 채용의 건입니다.

에셀은 후작 가문이지만 어릴적 가문이 풍비박산나는 바람에 집이고 영지고 다 넘어가고 늙은 집사가 빈촌에서 겨우 보살피며 살아온 아이입니다. 어느날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재력을 가진 상단 브라우닝스의 상단주인 ‘미혼 여성’ 칼리가 에셀을 찾아와, 너무 많고 귀찮은 혼인신청을 날려버리기 위해 남편 계약을 제시하지요. 마침 집사 알버트가 오늘내일 하는지라 너무 급한 에셀은 신청을 받아들이고 계약제 직원(?)으로 칼리의 남편으로서 브라우닝스와 연을 맺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에셀을 처음에는 보살피는 칼리의 모습, 좀더 성장하고자 애쓰는 에셀의 노력, 성장하고 나서 동등한 자리에 서서 역할을 하고자 하는 에셀, 그리고 칼리가 왜 상단주란 자리에서 이리 애쓰고 있는지에 대한 과거 이야기, 그리고 에셀과 칼리의 두 사람의 알콩달콩 밀당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상당한 분량이지만 꽤나 탄탄하게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이 즐거운 작품이에요. 두 사람 뿐만 아니라 하퍼 총관, 보디가드 용병대장 메이슨과 그 부인(왕년의 용병!), 수학천재 회계사 에이미 로즈와 변호사 어니스트 등 조연들도 하나하나가 너무 매력적이고 한명한명의 스토리도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알콩달콩 닭살돋는 연애묘사만 견딜수 있다면 즐겁게 볼 수 있는 추천작입니다~

순양전함 나이키

순양전함 나이키8점
데이비드 웨버 지음, 강수백 옮김/행복한책읽기

제목이 좀 거시기합니다만, 얼마 전 재미있게 읽은 아너 해링턴 시리즈의 3번째 책입니다. 여왕 폐하의 해군에서 또다시 헤이븐 공화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마치고 생환한 아너가 순양전함 함장이 되어 행콕 기지로 부임해서 맨티코어 vs. 헤이븐의 전면전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상황을 다룬 스토리에요.

이번에는 이전 두 편에 비해 상당히 상황이 괜찮아서, 부관도 사관학교 시절의 룸메이트이자 절친, 상사도 꽤 능력있는 제독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순순히만 흘러가면 재미가 없죠. 상사의 상사는 전체적인 성계의 전황에 대응하기 위해 행콕 기지를 거의 비우다시피 하게 되고, 헤이븐은 맨티코어가 모르는 정보망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파악, 바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해링턴은 상사와 함께 또다시 사력을 다해 싸우게 되는데 여기에 능력없고 자존심만 센 악연의 영 함장도 해링턴의 수하 함대임에도 명령에 따르지 않아 힘든 상황에 처하기도 하죠. 하지만 대국적으로는 헤이븐이 커다란 실책을 하게 되고 이 커다란 전투에서 승기를 놓치게 되어 국가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게 되네요.

아마도 헤이븐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한 편이었던 모양입니다. 해링턴의 활약이 상당히 축소된 이야기 전개가 확실히 느껴지고, 그래서인지 다음 권 초반을 보면 해링턴이 조사관에게 엄청 시달리는 장면으로 시작되네요 (번역이 안되어 원서로..). 출간 시기를 봐도 이 한 권은 다음 권으로 이어지는 상권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원제가 Short victorious war 인걸 봐도 전쟁이 짧게 지나가는거고 본편은 다음편 Field of Dishonor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쉽게도 번역판이 3권으로 끝났기에 간만에 원서를 집어들어야겠네요.

러브레터

러브레터 30주년 재개봉 특집 - 러브레터 HISTORY 1995-2025 : 네이버 블로그

R.I.P. 나카야마 미호 (1970-2024)

어릴적 보았고, DVD와 음반도 있습니다만,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는건 처음이었네요. 30주년 기념으로 4k 화질에 번역도 다시 손본 버전으로 메가막스에서 관람했습니다. 몇번째인지 모를 재개봉이지만 이번이 특별한건 주인공 히로코/이츠키 역의 나카야마 미호 씨가 작년 말 갑작스레 사망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확실히 영상으로 볼 때와 극장에서 관람할 때는 몰입도나 세부에 대한 민감도가 달라진다는 느낌이 드는 관람이었어요. 처음 히로코와 이츠키의 어머니가 대화하는 묘소라든지 아키바가 작업하는 공간이 고베였다는걸 이번에 알았네요. 그래서 아키바가 간사이벤을 쓰고, 히로코도 종종 상황을 회피할때 사투리를 쓰는거였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오타루가 상당히 먼 곳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새롭기도 했습니다. 그 거리감이 있기에 히로코와 이츠키 사이에서 왕복하는 편지가 더 의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네요.

그리고 예전 대비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도 한몫. 일본의 우편은 주소뿐만 아니라 명패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서, 이름이 맞지 않으면 배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였다는 것. 이사를 갔거나 집이 없다면 배송되지 않았을 편지가, 주소 그대로 그 집에 ‘후지이’ 이츠키가 거주했기에 편지가 배송될 수 있었다는게 참 신기했겠구나 하고 공감할 수 있었기에 히로코의 긴가민가 흐뭇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마음이 더 잘 느껴졌어요.

감성적인 장면은 여전히 감동적이었고, 음악 역시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느낌. 중학교를 돌아볼때라든지 도서실에서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라든지, 사춘기 학생들의 밀당이라든지 일탈하는 행동 등도 저 시절이니까 그랬지 하는 마음도 참.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도 참 잘 느껴지는게 너무 좋았습니다.

어릴적 볼 때는 아키바가 참 못됐다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보고 난 지금에 와서는 이제서야 공감이 된다 싶네요. 히로코의 마음이 정리되고 쏟아낼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받쳐주고 이야기하고 기다려주는 마음이 절절. 마지막 눈이 가득한 벌판을 혼자 뛰어가 코트도 떨어뜨리는데 놔두고 바라봐주는 마음. 그리고 그런 것을 느끼고 알기에 맘놓고 걸어가 이츠키에게 마지막 말과 감정을 소리치고 쏟아내 해소하는 히로코의 감정. 여전히 좋은 작품이고 여전히 감동적인 장면이네요.

좋았습니다. 간만에 느껴보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감성이었어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 포스터 — The Movie Database (TMDB)

드디어 봤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을 간만에 보네요. 확실히 여기저기 해석하기 어려운 스토리지만 보는 재미는 쏠쏠한 작품이었어요. 한컷 한컷에서 그려지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정감있는 화면이라니. 그러면서도 작품에 담긴 의미를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지루하거나 할 틈이 없는 솜씨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판은 떠나실 수 없을 것 같아요, 감독님.

예전에는 몰랐지만 아마도 센과 치히로부터는 조금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상징들을 여기저기서 펼쳐내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죽하면 작품을 보면서 블레이드 러너가 떠오를 정도였으니 말이죠. 단순히 보면 전쟁통 속에서 화재로 엄마를 잃은 아이가, 이모 집에 와서 묘한 환상세계로 빨려들어가 거짓말장이지만 순박한 왜가리, 음흉스러웠지만 젊을때는 믿음직스러웠던 아줌마(할머니?), 그리고 수수께끼같은 불의 힘을 다루는 소녀를 만나며 실종된 새엄마(이모)를 구출해내는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왜 주인공 마히토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냈는지, 새엄마는 왜 스스로 환상세계로 들어갔는지, 성 안에서 만난 돌은 왜 마히토를 끌어들이는지, 펠리칸과 앵무새들은 어째서 그 세계에서 공격적인 집단이 되었는지 등이 알듯말듯.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한번 여기저기 다양한 해석을 찾아보기도 해야 할 것 같고, 마히토의 어머니가 남긴 책 –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도 한번 보고싶어지기도 하네요. 마지막 순간에 잃은 어머니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고, 한 가족이 된 마히토와 이모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마무리였기에 오히려 다양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좀더 찾아봐야겠어요.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메가박스중앙㈜ 제공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메가박스중앙㈜ 제공

바비

THE BARBIE MOVIE 2023 B VERSION ORIGINAL CINEMA FILM PRINT PREMIUM POSTER

언제 보려나 하다가 드디어 봤네요. 이런 이야기였구나 싶었고, 예상외로 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오호 하기도 했어요. 초반의 닭살만 극복한다면 중후반은 후루룩 술술 넘어가는 느낌.

초반은 바비랜드의 묘사로 시작됩니다. 꿈같은, 세상과 동떨어진, 바비들만이 주인공인 세계. 하지만 이 완벽하기만 하던 바비만을 위한 세계에 균열이 시작되고, 이는 현실세계에서 한 모녀가 느끼는 바비에 대한 감각과 우울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바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로 들어와 우여곡절 끝에 자신에게 우울함을 투영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이들과 함께 복귀하면서 이야기가 해결되나 싶었지만..

사실 문제는 바비랜드 전체에 대해 우울함을 느끼고, ‘자신이 유일한 켄이 아님에’ 지속적으로 실망해왔던 켄이었어요. 용감하게 ‘특별한’ 켄이 되고자 현실세계로 따라왔다가 가부장주의의 맛을 보게 된 켄. 바비랜드로 돌아와 그곳을 켄돔(Kingdom → Kendom)으로 바꿔버립니다. 바비는 정신이 회까닥 나갔던 다른 바비들의 마음을 돌려 이런 켄의 음모를 저지하죠. 그리고 모든게 원래로 돌아가나 했지만, 그곳을 다시 새롭게 만드는건 바비들과 켄들의 몫, 그리고 사람들의 몫이기도 한걸 보면 정반합이란 개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여성의 권리와 차별에 대한 극복의 이야기는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등 구미에서도 여전한 이슈인가봅니다.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만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