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보관물: philia

용의자 X의 헌신

용의자 X의 헌신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재인

정말 오랜만에 집어든 추리소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으로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추리소설 취향이 아닌지라 한참동안 미루고 있다가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선택했어요. 몰입감은 확실해서 붙든지 이틀만에 완독. 하지만 추리소설이란게 그렇듯 해피엔딩은 아니니 쓸쓸한 결말은 좀 그렇네요.

나름대로 생활을 꾸리고 있는 모녀에게 스토커처럼 쫓아온 전 남편,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모녀에게 옆방의 수학교사 이시가미가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살인사건 현장과 시체, 알리바이를 치밀하게 계획해서 배치하는 이시가마를 상대로 형사들은 어렴풋이 이상함을 느끼고 모녀의 당일날 행방을 계속 조사하지만 헛발질을 하는 가운데, 학창시절 이시가미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유가와 마나부가 등장하면서 변화가 생깁니다. 사건을 숨겨놓은 이시가미와 그 맹점을 찾아내는 유가와, 그리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형사들 사이에서 결말을 처리한 작가의 솜씨가 두드러졌네요. 특히, 이시가미의 트릭이 막판에 밝혀지면서 왜 제목이 용의자 X의 ‘헌신’ 인지 알게 되는 순간 짜릿함이 느껴집니다.

한장 한장 읽어가면서 이시가미의 트릭이 정말 감탄스럽고, 그만큼 계속해서 책을 놓을 수 없는 흡입력 면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네요. 그리 즐기는 장르는 아니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주역인 유가와보다는 사건을 세팅하는 이시가미의 이야기가 혹시 계속 이어지는 후속편이 있다면 한번 더 보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민희, 치즈에 빠져 유럽을 누비다

민희, 치즈에 빠져 유럽을 누비다6점
이민희 지음/고즈윈

부모님 댁에 있어서 한번 보려고 집어온 책. 보통의 여행 에세이는 뻔한 스토리인데 치즈를 찾아다닌다니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잘 다듬어진 글은 아닌지라 (아마도 블로그 같은 곳에 연재했던듯?) 잘 읽히진 않지만 기대했던대로의 나름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네요.

크게 전반부는 대책없이 파리로 날아가 좌충우돌하면서 돌아다니던 고생기, 중간 이후부터는 역시나 대책없이 차를 몰고 치즈 산지를 돌아다니며 치즈공장에 들이닥치는 민폐기입니다. 그럼에도 어느정도 책이 될만한 내용이 만들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무대뽀인 주인공보다는 이를 받아준 마음좋은 치즈 생산자 분들 덕이 아닐까 싶었어요. 다만, 이런 과정이 하나하나 묘사된 덕에 치즈가 제작되는 과정은 어느정도 머리에 들어오게 된것 같네요 (농장마다 제작장마다 거의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다보니..)

읽고 나서 가장 먹어보고싶어진 치즈 1위는 콩테. 삶은 밤 같은 맛과 느낌이라니 어떤걸까 싶구요, 익히 많이 들어본 그뤼에르 치즈도 따로 먹어보고 싶어지기는 하더군요. 그 외에도 다양한 치즈가 소개되어 있지만, 그건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접할 기회가 있겠죠. 저자는 밤나무잎으로 싸놓은 연성 치즈 바농이 제일 인상깊고 제작과정도 잘 참여했기에 처음과 끝을 장식하도록 배치한 것 같지만, 일부러 찾아볼 정도인지는? 기회가 되면 맛볼 수 있겠지 하는 정도의 기대만 가지도록 할까 합니다.

오히려 후속 이야기, 그리고 여행 후 치즈와 관계된 좀더 체계적인 커리어가 쌓이는 이야기가 있으면 하는 희망이네요. 약간 아쉽지만 나름 흥미로왔던 책이었습니다.

지구 끝의 온실

지구 끝의 온실10점
김초엽 지음/자이언트북스

믿고 보는 김초엽의 SF입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좋았지만, 단편이라 아쉬움이 중간중간 묻어났는데, 이 작품은 그 아쉬움을 확실히 잡아주네요. 정말 믿고 보는 김초엽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푹 빠져서 며칠만에 주르륵 읽어내렸습니다.

나노봇의 이상증식으로 더스트 폴이라는 오염 안개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인류의 90%가 사라집니다. 그 와중에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마음으로 돔에 들어간 사람들과, 무슨 까닭인지 더스트에 대해 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여러 돔을 경유하며 생필품을 확보하려 하지만 실험대상이 되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나갑니다.

간신히 더스트 폴의 영향을 벗어난 세계, 예전 일어난 더스트 폴의 원인과 이를 이겨낸 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고, 화자인 아영은 어릴 적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엔지니어스러운 동네 할머니 이희수와의 기억을 가지고 에티오피아에서 더스트를 치료하던 마녀로 불리던 나오미를 만나 더스트를 이겨낸 식물과 그 식물을 개발하고 가꿔온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이지만 사람들의 이기심에 절망하기보다는, 이기심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간의 교류,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사람들과 떨어져 그들을 위한 작업을 이어가는 연구자, 그리고 그를 보살피던 엔지니어 등 따뜻하지만 교류에는 서투른 인간냄새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울립니다. 어찌 보면 노래하는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조금 더 인간적인 버전이라고나 할까요?

영화화되어도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런 이야기도 들리는 것 같네요. 섣불리 건드리지 말고 숙고해서 정말 좋은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간만에 정말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서울 선언

서울 선언10점
김시덕 지음/열린책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를 썼던 김시덕 교수의 서울 답사기입니다. 이번에는 동아시아의 구도가 아니라 어릴적부터 살아왔던 서울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서 서울이란 어떤 지역이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하고 남길 것인가에 대해 근현대 관점에서 서울 곳곳을 답사하면서 찾아본 이야기를 풀어낸 이야기에요. 특히 저자와 시기는 달랐지만 거주했던 지역이 겹치는지라 상상당히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잠실과 신천의 주공아파트 단지 이야기, 남산에서 용산, 영등포와 흑석동으로 이어지는 길, 가산(가리봉+독산) 등 서울 끝단의 공업단지 등 조선시대에서 비롯한 사대문 안쪽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립 전후해서 넓어진 수도 서울권에 대해 80여년간 쌓인 역사를 기록하고 이야기하는 입장에서 서술한 내용이라 더 친근감과 공감이 가는 내용이기도 했네요.

특히나 어릴적부터 궁금했던 강남의 영동이란 명칭이 일제시대 서울권역이 영등포쪽으로 확장되면서 영등포 동쪽이란 의미로 영동이 되었다는 것이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가산이란 명칭도 정해진 과정이 너무 신기했구요.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감추고 싶어하는 생각에 도시를 자꾸만 묻어가지만, 어느정도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그 시절을 다시 찾아내고 역사로 반영하는게 오히려 힘들어진 점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네요.

새로운 것이 좋고 깨끗해 보이기는 하면서도 허물어지기 전에, 지워지기 전에 기억과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 한 권이었습니다. 다음 권도 꼭 찾아봐야겠어요.

그리스인 이야기 1

그리스인 이야기 18점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살림 

산지 한참만에 보게 되었네요. 코로나 이전에 샀는데 부모님이 먼저 보시고 나중에사 받은데다가, 그동안 다른 책도 읽을게 많아서 계속 미루기도 했고 말이죠. 그래서 간만에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글을 읽는지라 신선한 감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도시국가 중심의 그리스 역사를 풀어간 1권입니다. 스파르타, 아테네, 테베, 코린토스 등 역사서에서 어디선가 들어봤던 국가들이 어떤 형태로 운영되고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특히 그리스의 영역이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각 도시의 위치와 주변 환경 – 아드리아해와 에게 해 및 페르시아와의 관계, 그리고 여러 섬의 위치와 영향권 분석이 어우러지면서 약간은 큰 뷰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주도했던 것은 역시나 스파르타와 아테네였죠. 여러 문헌과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 / 작가의 의견을 구분해 가면서, 스파르타의 장점은 무엇이고 정치체제의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스파르타를 이끈 유명한 인물들 (레오니다스+300 이라든지)이 이야기되고, 육군 중심의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이야기되며, 아테네가 어떤 과정을 거쳐 해군력을 확충했는지,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3차에 걸친 전쟁을 겪으며 해군과 섬 국가 중심으로 에게해를 방어하는 델로스 동맹이 형성된 과정이 그려집니다. 결과적으로는 두 가지 동맹이 그려지지만 육군 중심으로 반도를 방어하는 전자와 해군 중심으로 바다를 제압하는 후자는 경쟁이라기보다는 서로 영역이 달랐던 모습으로 그려지네요.

작가 성향답게 특정 인물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묘사를 하는 과정이 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뷰라고 생각합니다. 스파르타를 승리국으로 이끌었지만 정치체제 상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아테네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추방되어 결국 페르시아에서 삶을 마감한 두 장수가 특히 기억에 남기도 하구요.

2권에서는 아테네-스파르타 전쟁이 이야기되겠네요. 천천히 시간을 두고 또 한 권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