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

멀티버스

멀티버스

부록이지만 부록같지 않은, 에스콰이어 작년 11월호 부록이었던 SF단편집 멀티버스입니다. 한국의 대표적 현역(!) SF작가들이 에스콰이어 편집자와 의기투합(?)해서 기획했던걸 드디어 질러버렸다는 이야기가 서두에 있더군요 ^^

현역 작가들인만큼 재기넘치는 이야기들이 많아 즐겁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진화신화, 오보에가 있는 토요일, 앨리스와의 티타임이 인상적이었어요. 읽다가 그만두면 큰일나는 글도 기억에 남네요. 공통점이 무엇이려나 – 구체적인 설정과 완결된 이야기 구조, 잔잔한 감정의 묘사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네요. 단편이라도 크로키처럼 순간을 포착한 이야기보다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방점을 찍어주는걸 좋아하나봐요.

[spoiler show=”작품별 감상” hide=”닫기”]김보영-진화신화

개체진화가 엄청나게 빨리 진행되는 세계를 가정한 이야기입니다. 같은 개체일지라도 행동양식이나 성격에 따라 모습에서 종까지 변화가 일어나는 세계,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긴 왕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해다니면서, 왕자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왕자의 생각의 흐름, 모습의 변화를 이야기로 풀어나가네요. 다 읽고 나면 짧으면서도 하나의 신화를 완성했다는 느낌이 흐뭇합니다.

이수현-안개 속에서
외따로 떨어진 어느 행성의 구석마을에 여행자가 나타납니다. 이계에 ‘있을 수 있는’ 풍경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정세랑-모조 지구 혁명기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연상케 하는 설정과 이야기랄까요. 유쾌한 필치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위가 좀 약해서.. 천사는 아름답지만 너무 아파보이고, 인면어(?)들도 징그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소유주께서도 좀.. 음, 넘어가죠.

박성환-얼음, 땡!
예비군이라니! 게다가 꿈이었다니!

윤이형-오보에가 있는 토요일
이무기님도 쓰셨지만, 나의 지구를 지켜줘를 연상시키는 스토리입니다. 까닭모를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옅어져가는 기억, 무언가 내가 내가 아닌 듯한 느낌 등을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놓은 것 같달까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살아가기로 한 주인공에게 힘을 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김창규-카일라사
지구가 기나긴 전투를 겪은 외계인의 휴양소라는 설정이 마치 옛날의 환상특급을 보는것 같았네요. 그 와중에도 살짝 로맨스를 엮어넣은 작가의 대담함이랄까.. 뭔가 더 길고 역동적인 장편을 기대하게 하네요. 이 단편 하나로는 왠지 아쉬워요.

정소연-앨리스와의 티타임
방문을 열고 돌아다니는게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그 세계에서 만난게 앨리스라니! 혹시나 진짜 동화속의 앨리스려나 하는데, SF세계에서 작가의 완소 작가라는 사실이 미묘한 즐거움을 줬어요. 게다가 혹시 모르죠, 그 작가가 진짜 동화속 앨리스인지도요. 설정 자체는 코니 윌리스의 작품과 살짝 겹치는듯 하면서도, 이런 미묘한 연결고리가 더욱 즐거움을 주네요.

곽재식-읽다가 그만두면 큰일나는 글
우주에 대한 탐구가 신의 실존 문제로, 그 실존 문제가 해석학으로, 그 해석학이 해킹으로, 그리고 외계에 대한 메시지 전달로, 그를 통해 다시 신이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한 탐구로 계속 이어지는 설정이 어지럽습니다. 읽다가 그만둬도 큰일나지만, 이런 이야기가 계속되면 어쩌나 했네요 ^^

배명훈-발자국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유한 작품입니다. 너무나 민주적으로, 대화를 통해 정부와 시민이 문제를 풀어가는 세계에서, 그렇지 못한 현실이 자국을 남기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런 아이러니를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를 가정하고 쫓아가도록 강제하는 비민주적인 정부와 군대가 목적도 모르고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들과 이어져 묘한 비틀림을 만들어냅니다. 아, 현실이 참.. 그렇네요.

[/spoiler]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