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 001화10점
정수읠/매드햇

작년이었나 웹소설에 관심이 생겨 어떤 작품이 인기있나 찾아보다가 보게 된 것 하나가 먼저 읽고 다른 작품들까지 즐겁게 읽었던 유폴히님의 읽씹왕자(혹은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였고, 또다른 하나가 바로 이 정수읠님의 문송안함이었어요. 워낙 혼란스러운 스토리였으나 나름 중심을 잘 잡고 진행되던 터라 그래도 끝까지 쫓아가고 있었는데, 드디어 완결이 났네요. 그것도 워낙 만족스러웠던 터라 만점으로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다만, 추천하기에는 좀 저어되는게,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더라도 취향에 따라 스토리의 복잡함에 머리를 싸맬 사람들을 알기에.. 일단은 저는 너무 즐거웠다는 것으로 한표.

시작은 단순한 빙의물이었어요. 독특하다면 편집자한테 투고된 원고를 보다가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 거기가 판타지 세계라 마법과 검술이 중요했던 것이고, 주인공인 정진 (혹은 클레이오 아세르)에게 편집자 권한이 주어져 작자의 동의가 있다면 수정이 가능했다는 면이겠네요. 처음에는 스토리를 아니까 기회를 잡아 재산을 불리고 띵가띵가 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형제들의 증오를 뚫고 왕위를 이어야 하는 세째왕자 아서 리오그난과 만나게 되고 왕립 아카데미의 특출난 동기들과 엮이면서 + 므네모시네의 문으로 들이닥치는 마수의 습격과 그 내부의 이공간 미션을 파훼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렇지만 단순한 RPG 소설로 끝나지 않는건 아무래도 작가의 문과사랑 때문일지? 스토리 자체가 첫 번째가 아닌 9번째로 변경된 수정본인데 주요 인물들은 그 반복된 과정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고, 세계를 구성하는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는데 이야기의 개연성은 갈수록 삐그덕댑니다. 스토리 자체를 부수고자 하는 황태자 멜키오르, 아서를 누구보다 증오하여 세상을 부수더라도 죽이고 싶어하는 아슬란에 맞서 아서와 클레이오는 이시엘과 첼, 리피/레티샤, 프란 등의 동기들과 함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완결하고자 힘을 쓰게 되네요.

하지만 이 스토리로서의 이야기를 뛰어넘어, 편집하는 과정의 이야기, 그리고 몇 번에 걸친 수정과 변경 속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작자의 퇴고 과정, 쓰는 것은 작자이지만 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편집자라는 인식 등을 종합해나가면서 전개되는 마무리는 정말 멋진 구성이기에, 그러면서도 스토리의 재미 또한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어디서 이런 작가가 나왔나 싶기도 해요.

그만큼 칭찬하고 싶지만, 과연 차기작도 이 정도로 멋지게 뽑아낼 수 있을지, 혹은 이보다 더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을지 기대해보고 싶은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이네요. 어쨌든, 책으로 나오면 구입하고 다시 일독해야겠습니다.

아발론 연대기 1: 마법사 멀린

아발론 연대기 16점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북스피어

아더 왕 전설과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의 신화/설화를 모아서 편찬한 아발론 연대기의 1권입니다. 예전에 몇 권까지인가 읽었었는데, 너무 길어서 의무감처럼 읽다가 머릿속에도 남지 않는 것 같아 접어두었다가 다시 읽기 시작했네요. 단순히 마법사이자 드루이드로서의 멀린뿐만 아니라, 악마의 아들이지만 그 손을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의 보고가 된 현자로서의 멀린의 행로를 따라가면서, 켈트 신화와 기독교 전설이 혼합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아더 왕 이야기는 아마도 후속 권에서 많이 다뤄지기 때문에 후반에 잠깐만 등장하네요. 정체를 숨기고 어떤 기사의 손에서 자라나면서 케이와 베더비어와 친형제처럼 자라나고, 유더 사후 왕을 선출하는 자리에서 엑스칼리버를 뽑는 장면까지만 이야기됩니다. 이 책에서는 그 전 멀린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 멀린이 처음으로 태어났을 때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맞서 용의 저주를 막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예언을 하는 장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불륜, 골로이스 공작 부인인 이그레인에게 반한 유더와 아더의 탄생 등 부분부분 알고 있었으나 상세한 내용은 몰랐던 야사 등이 재미있었네요.

여기에 더해 후반부에는 성배에 관한 전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줍니다. 루시퍼가 추락하면서 떨어져나간 보석이 성배로 만들어지고, 아리마데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면서 그 성배에 성혈이 담기는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해 굴에 갇힌 요셉이 긴 기간동안 성배의 은혜로 살아남고, 구출된 이후 성배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앉게 되는 원탁을 만들며, 그 가운데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위험한 자리가 마련되는 과정 등이 이야기되어 있네요.

2권에서는 이제 아더 왕 이후 원탁의 기사들에 대한 내용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분명 읽었지만 기억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아 흥미로울 것 같네요. 시간될 때 하나씩 읽어보도록 하죠 🙂

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

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6점
셰리 토머스 지음, 이경아 옮김/리드비

셜록 홈즈가 여성이었다는 설정으로 빅토리아 시대에서 여성이 독립하여 살기, 당시의 사회상이나 남녀 관계, 그리고 범죄와 로맨스 등을 새로운 관점에서 묘사한 레이디 홈즈 시리즈의 1편이자 개요 버전입니다. 사실 사건보다는 샬롯 홈즈라는 통통하고 귀여운(?) 양가집 레이디가 남다른 관찰력과 논리력을 가지고서도 능력을 숨길 것을 강요받는 상황 하에서 사고를 침으로써 가족과 절연하고 집을 나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며 인연을 만들어가 사립 탐정이라는 일을 시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사건 자체는 희미하게 샬롯의 독립 과정에 따라오지만, 엉겁결에 샬롯의 독립과 엮여서 풀려나간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주요 사건은 시골에서 갑작스럽게 동맥 파열로 사망한 해링톤 색빌 경의 죽음과, 샬롯이 친 사고를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슈르즈버리 부인의 죽음에 대한 연관성과 살인범 탐색이지만, 샬롯의 친우인 잉그램 경, 그를 통해 정보를 얻고 수사에 활용하는 트레들스, 홈즈를 후원하며 사무실 공간도 제공해주는 왓슨 부인, 사건을 꾸미고 여성으로서 먼저 독립해서 복수를 펼치는 론스데일 양과 남편 모리어티(!),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글로 펼쳐내는 언니 리비아까지 인물 소개적인 면모가 더 돋보이네요.

일반적인 셜록 홈즈 패러디와는 달리 사건 구성, 인물간의 스토리, 그리고 글로 남기는 과정까지 새로 창조된 버전의 주홍색 연구라는 느낌입니다. 미국 유타를 배경으로 한 원래의 스토리와, 영국에서 일어난 독신 귀족 남성의 추문에 대한 수년 뒤의 복수극을 재창조한 작가의 솜씨는 정말 멋드러지다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등장하는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화신인 밴크로프트 경은 어떤 모습일지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다음 권인 벨그라비아 사건은 아마도 보헤미아 스캔들의 리메이크일 것 같은데 빨리 보고 싶네요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

누군가 추천글에서 올해 본 영화 중 매버릭보다 더 재밌게 본 영화가 있다길래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런 영화일 줄이야?! 올해는 아무래도 멀티버스가 영화계 유행인가봅니다. 메이저 자본이 투입된 영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아트무비 쪽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제작사 작품인가본데, 정말 감독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4차원적인 시나리오를 가지고 이렇게 정신없는 이야기를 깔끔하게 연출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네요. 그리고 주연들 역시 헐리웃에서 받은 차별을 한번에 풀고 싶은지 정말 다들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펼쳐보입니다. ㅎㅎ

어릴적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친과 미국으로 건너가 열심히 세탁소 일에 치이면서 딸을 키우는 이블린 왕(양자경)이 주인공입니다. 남편 웨이먼드 왕은 애정 하나만으로 이블린을 미국에 데려왔지만 억척스러운 일에 파묻혀 행복하지 못해하는 부인을 보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지 못해 이혼을 고민하고 있고, 딸 조이는 대학까지는 잘 갔으나 자퇴하고 미국인 파트너를 데리고 커밍아웃하며 갈등이 있는 상황, 결혼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불편한 몸과 치매끼로 미국으로 건너와 이블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세무사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는 이블린의 탈세를 의심하면서 증빙하지 못하면 사업장을 압류하려는 상태. 한마디로 불행의 총합인 상태에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민 가족을 이끄는 여인의 잔혹사 같은 느낌인데, 세무서 건물 엘레베이터에서 남편이 갑자기 특수한 이어셋을 주며 세금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뜬금없는 메시지를 전하며 상황이 뒤집힙니다. 뜬금없는 적들이 남편과 자신을 잡으려 뛰어들고, 세무사는 프로레슬링 기술을 선보이며 남편을 집어던지는가 하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존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딸 조이의 멀티버스 버전, 모든 세상의 고민과 진실을 담은 에브리씽 베이글이 모든 것을 흡수하도록 하려는 음모에 맞설 수 있는 존재는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불행한 선택만을 한 현재 버전의 이블린밖에 없다는 진실을 전해줍니다.

그 가운데 선보이는 수많은 오마주가 이 심각한(?) SF를 코믹과 결합해줍니다. 매트릭스의 기술 다운로드, 성룡의 쿵푸 액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침팬치, 라따뚜이의 요리사를 조종하는 동물 장면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패러디 속에 가족의 의미를 다시 보여주는 스토리가 마음을 움직이는 면모도 보여주네요. 단, R등급이란 면은 주의해서 봐야 할듯. 뜬금없이 등장하는 코믹 요소가 깜짝 놀랄 정도의 수위라 가능하면 혼자 낄낄거리는 쪽을 추천드립니다.

이런 영화가 나름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상당한 성적을 거둔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관객이 영화에서 기대하는 범위가 나름 다양하다는 느낌도 드네요. 아마도 한국에서는 개봉하기 힘들듯 하지만 기회가 되는 분들은 (그리고 어느 정도 B급 수위에 대해 면역이 있는 분들은) 즐겁게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덧, 어릴적 구니스에서 봤던 동양계 소년이 훌쩍 커서 남편 웨이먼드 역으로 출연하네요. 너무 오랜만이라 전혀 몰랐는데 반가왔습니다 🙂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6점
김산해 지음/휴머니스트

(Fate:Grand order 덕분에) 이름은 많이 들어본 길가메쉬였는데, 어떤 신화인지 이야기인지 모르고 알음알음 설정집 등을 통해서 조각조각 알게 된 내용을 한번에 정리해서 볼 수 있는 책이었네요. 의외로 여기저기서 들어본 명칭이 많이 나와서 놀라기도 했구요.

일단 시작은 수메르 문명부터입니다. 기원전 4천년이 넘은 옛날 최초의 국가를 세웠고, 이들에 이어서 악카드(셈족) – 히브리 – 바빌론 – 앗시리아 등의 국가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수메르는 쐐기 형태의 설형문자를 사용했고, 이 책은 이런 설형문자로 기록된 석판을 해석한 내용을 구성한 내용으로 되어있어요. 그런만큼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던 많은 내용이 이 수메르 기록에 쓰여있는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많이들 알고 있는 대홍수에 대한 내용 외에도 아담과 에덴동산, 뱀에 대한 저주, 카인과 아벨 등의 이야기가 수메르 신화와 역사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건 참 흥미로왔어요.

여기에 주인공인 길가메쉬와 그의 시종이자 절친인 엔키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강하지만 너무 맘대로 힘을 휘두르는 길가메쉬 왕을 제어하기 위해 야생에서 태어나 자란 엔키두를 신전의 여성을 이용해 끌어들여 왕과 싸우게 하고, 결국 두 사람이 화해하고 모험을 해나가지만, 신의 저주를 받은 엔키두가 죽으면서 영원히 살고자 여행을 떠나는 길가메쉬와 영생을 한 끗 차이로 놓치는 이야기에요. 중간중간 빠진 문장이 있지만 이렇게 이야기로 엮을 수 있는 스토리를 몇천년이 지난 지금 해석해서 읽을 수 있다는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명칭인 에리두가 이 수메르에서 인간을 만든 신 엔키가 인간을 만들고 지내게 한 최초의 도시의 명칭이란 것을 알게 된게 제일 인상적이었네요. 그 외에도 이 수메르 신화가 성경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도 영향을 줘서 제우스의 어이없는 행동이 수메르 신화의 내용에 그 원류가 닿아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요.

읽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아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역사의 기록과 발굴, 해석의 가치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였던 것 같네요 🙂